■ 박지성이 말하는 축구행정가의 꿈
그분들 밑에서 선수로 뛰면서 느낀 점
행정가의 길이 나나 모두에게 더 나아
좋아하는 일 하며 고통받기 싫어 은퇴
선수 시절 생존법? 감독 말 잘 들었죠
일주일여의 출장 기간 내내 내리다 말다를 반복하던 비가 어느새 멈추고 따사로운 태양이 살포시 고개를 내밀었다. 이달 초 런던 남서부 윔블던의 한 작은 카페에 군청색 세미 정장 차림으로 모습을 드러낸 박지성(35·JS파운데이션 이사장)의 입가에는 평소에 볼 수 없던 미소가 가득했다. 따뜻한 커피 한 모금을 삼킨 그에게 항상 반복하는 우문을 던졌다. “지금 정말 행복하냐”고. “지금 너무 행복하다. 이렇게 살고 있음이 행복하다. 아내가 생기고, 아기가 태어나는 것은 이 세상의 대부분의 남자들이 경험하는 것이지만, 이렇게 평범하게 살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소중한 일이다.”
당초 약속한 시간을 훌쩍 넘기면서도 성심성의껏 스포츠동아와의 인터뷰에 응한 그가 가끔 시선을 돌릴 때가 있었다. 이 작은 카페에 엄마에 이끌려 함께 찾은 어린아이, 유모차에서 세상모르게 단잠에 빠진 아기들이 지나칠 때였다. “내가 뭘 하는 사람인지, 또 내가 누구인지 누구도 잘 모르는 그런 보통의 삶을 살고 있다. 다만 예전과 달라진 점은 있다. 아이와 아기들을 쉽게 지나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내 딸이 더 생각나더라. 이런 게 아빠이기에 느끼는 그런 감정 아닐까.” 유명해지고 난 뒤부터 오랫동안 잊고 있던 ‘평범한 삶’을 보내는 박지성과의 대화록을 풀어본다.
● 학생&제2의 삶
-최근 국제축구연맹(FIFA) 마스터코스에 도전했다. 영국에도 스포츠산업 등을 비롯해 다양하게 공부할 수 있는 길이 있는데, 굳이 이 코스를 선택한 배경은.
“실무적인 과정에 초점을 맞췄다. FIFA 마스터코스가 훨씬 넓은 기회를 제공하리란 생각을 했다. 다양한 국가의 학생들을 모집하는 만큼 네트워크 측면에서도 도움이 될 것이라 봤다. 더 다양하고 넓은 지역,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을 접할 수 있는 이점도 있었다. 특히 FIFA가 운영하는 학문과정이니 축구에 더 도움을 주지 않겠나.”
-FIFA 마스터코스를 이수한 뒤 구체적으로 생각한 길은 정리됐는지.
“솔직히 아직 완전히 구체적으로 생각하진 않았다. 지금은 좋은 축구 행정가가 되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을 거치는 단계다. FIFA 마스터코스를 마치더라도 향후 밟아나가야 할 일련의 단계들이 있다. 스텝바이스텝이다. 시간을 길게 보고 있다. 다만 프로클럽 등이 아닌, FIFA나 유럽축구연맹(UEFA), 아시아축구연맹(AFC) 등 대륙을 관장하는 조직에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다.”
-행정가의 길을 굳힌 듯하다. 여전히 지도자에 대한 욕심은 전혀 없나. 왜 지도자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나.
“(단호히) 전혀 없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생각에 변함은 없다. 내게 좋은 감독이 될 자질은 없다. 굳이 지도자가 된다면 코치가 가장 이상적인 위치라고 생각했다.”
-현역 시절 국가대표팀 캡틴 완장도 차지 않았나. 후배들도 좋은 리더라고 했다.
“내가 선수로 뛰면서 알렉스 퍼거슨 감독과 거스 히딩크 감독 등의 지도를 받을 때 항상 느낀 것은 내가 저렇게 될 수 없다는 부분이었다. 리더십과 선수장악력일 수도 있고. 대표팀 주장과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후배들은 종종 내가 카리스마가 있다고 느꼈다는데, 그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빅리그 선수로서의 후광의 힘이 컸다. 결국 행정가의 길이 내 자신에게나, 모두에게나 더 낫다고 판단했다.”
-현장에서의 성공적인 걸음이 행정가로서도 도움이 될까.
“학문을 통해 현장에서 얻지 못한 경험을 축적할 수 있고, 이론적인 갈증을 채울 수 있다는 생각이다. 반대로 선수 출신이 아닌 축구 행정가 대부분이 공부로서 그 길에 접어들지 않았나. 내 유일한 장점은 현장에서 꾸준히 선수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축구 행정가가 되면 또 유명해지지 않겠나.
“그래도 선수 때보다는 덜하지 않겠나?(웃음) 적어도 그 이상은 아니겠지. 다행히 시간이 흐를수록 날 향한 관심은 차츰 줄어들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여전히 좋은 축구선수로 나를 기억해주면 된다. 유명해지면 또 그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한다.”
● 축구인 박지성
-축구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
“내 인생에서 어떻게 축구를 빼고 이야기를 하겠나. 나와 뗄 수 없는 스토리를 주는 단어다. 분명 상대적으로 많은 부와 명예도 줬다. 명문 클럽에서 오랜 시간을 뛰었다는 것은 그만한 연봉을 받았다는 의미니까.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내가 어릴 적 꿈을 이뤘다는 점이다. 유명한 선수였다는 사실보다 태극마크를 달고 나름 괜찮은 활약을 했다는 자부심이 있다.”
-클럽에서, 대표팀에서의 자부심은 어떻게 달랐나.
“솔직히 단 한 번도 내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뛸 수 있다는 생각을 못 했다. 어릴 적 가슴에 품은 갈망은 오직 월드컵이었다. TV 중계로 느꼈던 그 설렘이나 감정을 잊을 수 없다. ‘아, 저기서 뛰고 싶다’는 생각을 이뤘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내가 유년기를 거칠 때 지금처럼 매스컴에서 해외축구 소식을 끊임없이 접했다면 좀더 큰 꿈을 가졌을 텐데, 그렇진 않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국가를 대표해 무언가 일을 조금이나마 한 것은 정말 큰 자부심이다. 팀에서의 영광은 개인적인 일이다. 난 이미 내가 이룰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얻었다. 그 이상을 바랐다면 욕심이고.”
-정말 축구를 잘했다 싶을 때가 있나. 현역을 조금 빨리 떠난 아쉬움은 없나.
“오히려 더 잘할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은 종종 한다. 오히려 ‘난 여기까지밖에 안 되는 선수였구나’라는 생각에 아쉬움이 남는다. 앞으로 나보다 훨씬 좋은 선수들이 계속 탄생할 것이다. 물론 난 굉장히 운이 좋은 선수였다. 올림픽대표가 되는 과정은 아주 어려웠지만, 그 이후는 비교적 순탄했다. 좋은 클럽에서 좋은 스승들을 거쳤고, 다양한 부분들이 잘 맞아떨어졌다. 은퇴는 부상 탓이다. 은퇴 직전 시즌에는 뛰는 내내 고통을 느꼈다. 그런 무릎을 갖고 계속 뛰는 것은 무리였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며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은퇴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숱한 클럽을 거치면서 가장 우선시한 기준이 있었는지.
“감독이 얼마나 날 원하느냐가 최우선 순위였다. 솔직히 일본 J리그 교토상가로 갈 때는 이런저런 것들을 배제한 채 막연히 한국과 다른 축구를 경험하자는 마음이 컸다. 그 후에는 감독이 날 얼마나 크게 쓸 수 있는지가 중요했다. (많은 이들이 의문을 보이지만) QPR로 향할 때도 불안감은 전혀 없었다. 혹여 완전히 실패하더라도 내 과거가 사라지는 게 아니란 생각을 했다.”
-당신은 정말 어떤 선수였나? 그냥 성실함이 무기는 아닐 텐데.
“딱히 언급할 만한 장기가 없는 선수? 그렇다고 특별한 단점도 없었기에 생존할 수 있었다. 난 유럽과 전혀 다른 문화에서 온 이방인이었는데, 그 문화가 외국 감독들이 굉장히 좋아할 수 있는 성향을 심어줬다. 감독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 감독이 신선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2008년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뛰지 못했는데, 그 순간은 정말 화가 났다. 그런데 난 스스로 문제를 찾아냈다. 결과적으로 날 뛰지 않게 한 것은 감독의 옳은 판단이었다. 그를 통해 날 더욱 단련하고 발전시킬 수 있었으니. 이듬해 우승하진 못했지만,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또 한 번의 결승전에 나설 수 있지 않았나. 우승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일원이 아니었다면 내 인생에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역시 없었다.”
런던 | 남장현 기자 yoshike3@donga.com
그분들 밑에서 선수로 뛰면서 느낀 점
행정가의 길이 나나 모두에게 더 나아
좋아하는 일 하며 고통받기 싫어 은퇴
선수 시절 생존법? 감독 말 잘 들었죠
일주일여의 출장 기간 내내 내리다 말다를 반복하던 비가 어느새 멈추고 따사로운 태양이 살포시 고개를 내밀었다. 이달 초 런던 남서부 윔블던의 한 작은 카페에 군청색 세미 정장 차림으로 모습을 드러낸 박지성(35·JS파운데이션 이사장)의 입가에는 평소에 볼 수 없던 미소가 가득했다. 따뜻한 커피 한 모금을 삼킨 그에게 항상 반복하는 우문을 던졌다. “지금 정말 행복하냐”고. “지금 너무 행복하다. 이렇게 살고 있음이 행복하다. 아내가 생기고, 아기가 태어나는 것은 이 세상의 대부분의 남자들이 경험하는 것이지만, 이렇게 평범하게 살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소중한 일이다.”
당초 약속한 시간을 훌쩍 넘기면서도 성심성의껏 스포츠동아와의 인터뷰에 응한 그가 가끔 시선을 돌릴 때가 있었다. 이 작은 카페에 엄마에 이끌려 함께 찾은 어린아이, 유모차에서 세상모르게 단잠에 빠진 아기들이 지나칠 때였다. “내가 뭘 하는 사람인지, 또 내가 누구인지 누구도 잘 모르는 그런 보통의 삶을 살고 있다. 다만 예전과 달라진 점은 있다. 아이와 아기들을 쉽게 지나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내 딸이 더 생각나더라. 이런 게 아빠이기에 느끼는 그런 감정 아닐까.” 유명해지고 난 뒤부터 오랫동안 잊고 있던 ‘평범한 삶’을 보내는 박지성과의 대화록을 풀어본다.
● 학생&제2의 삶
-최근 국제축구연맹(FIFA) 마스터코스에 도전했다. 영국에도 스포츠산업 등을 비롯해 다양하게 공부할 수 있는 길이 있는데, 굳이 이 코스를 선택한 배경은.
“실무적인 과정에 초점을 맞췄다. FIFA 마스터코스가 훨씬 넓은 기회를 제공하리란 생각을 했다. 다양한 국가의 학생들을 모집하는 만큼 네트워크 측면에서도 도움이 될 것이라 봤다. 더 다양하고 넓은 지역,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을 접할 수 있는 이점도 있었다. 특히 FIFA가 운영하는 학문과정이니 축구에 더 도움을 주지 않겠나.”
-FIFA 마스터코스를 이수한 뒤 구체적으로 생각한 길은 정리됐는지.
“솔직히 아직 완전히 구체적으로 생각하진 않았다. 지금은 좋은 축구 행정가가 되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을 거치는 단계다. FIFA 마스터코스를 마치더라도 향후 밟아나가야 할 일련의 단계들이 있다. 스텝바이스텝이다. 시간을 길게 보고 있다. 다만 프로클럽 등이 아닌, FIFA나 유럽축구연맹(UEFA), 아시아축구연맹(AFC) 등 대륙을 관장하는 조직에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다.”
-행정가의 길을 굳힌 듯하다. 여전히 지도자에 대한 욕심은 전혀 없나. 왜 지도자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나.
“(단호히) 전혀 없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생각에 변함은 없다. 내게 좋은 감독이 될 자질은 없다. 굳이 지도자가 된다면 코치가 가장 이상적인 위치라고 생각했다.”
-현역 시절 국가대표팀 캡틴 완장도 차지 않았나. 후배들도 좋은 리더라고 했다.
“내가 선수로 뛰면서 알렉스 퍼거슨 감독과 거스 히딩크 감독 등의 지도를 받을 때 항상 느낀 것은 내가 저렇게 될 수 없다는 부분이었다. 리더십과 선수장악력일 수도 있고. 대표팀 주장과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후배들은 종종 내가 카리스마가 있다고 느꼈다는데, 그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빅리그 선수로서의 후광의 힘이 컸다. 결국 행정가의 길이 내 자신에게나, 모두에게나 더 낫다고 판단했다.”
-현장에서의 성공적인 걸음이 행정가로서도 도움이 될까.
“학문을 통해 현장에서 얻지 못한 경험을 축적할 수 있고, 이론적인 갈증을 채울 수 있다는 생각이다. 반대로 선수 출신이 아닌 축구 행정가 대부분이 공부로서 그 길에 접어들지 않았나. 내 유일한 장점은 현장에서 꾸준히 선수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축구 행정가가 되면 또 유명해지지 않겠나.
“그래도 선수 때보다는 덜하지 않겠나?(웃음) 적어도 그 이상은 아니겠지. 다행히 시간이 흐를수록 날 향한 관심은 차츰 줄어들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여전히 좋은 축구선수로 나를 기억해주면 된다. 유명해지면 또 그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한다.”
● 축구인 박지성
-축구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
“내 인생에서 어떻게 축구를 빼고 이야기를 하겠나. 나와 뗄 수 없는 스토리를 주는 단어다. 분명 상대적으로 많은 부와 명예도 줬다. 명문 클럽에서 오랜 시간을 뛰었다는 것은 그만한 연봉을 받았다는 의미니까.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내가 어릴 적 꿈을 이뤘다는 점이다. 유명한 선수였다는 사실보다 태극마크를 달고 나름 괜찮은 활약을 했다는 자부심이 있다.”
-클럽에서, 대표팀에서의 자부심은 어떻게 달랐나.
“솔직히 단 한 번도 내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뛸 수 있다는 생각을 못 했다. 어릴 적 가슴에 품은 갈망은 오직 월드컵이었다. TV 중계로 느꼈던 그 설렘이나 감정을 잊을 수 없다. ‘아, 저기서 뛰고 싶다’는 생각을 이뤘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내가 유년기를 거칠 때 지금처럼 매스컴에서 해외축구 소식을 끊임없이 접했다면 좀더 큰 꿈을 가졌을 텐데, 그렇진 않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국가를 대표해 무언가 일을 조금이나마 한 것은 정말 큰 자부심이다. 팀에서의 영광은 개인적인 일이다. 난 이미 내가 이룰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얻었다. 그 이상을 바랐다면 욕심이고.”
-정말 축구를 잘했다 싶을 때가 있나. 현역을 조금 빨리 떠난 아쉬움은 없나.
“오히려 더 잘할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은 종종 한다. 오히려 ‘난 여기까지밖에 안 되는 선수였구나’라는 생각에 아쉬움이 남는다. 앞으로 나보다 훨씬 좋은 선수들이 계속 탄생할 것이다. 물론 난 굉장히 운이 좋은 선수였다. 올림픽대표가 되는 과정은 아주 어려웠지만, 그 이후는 비교적 순탄했다. 좋은 클럽에서 좋은 스승들을 거쳤고, 다양한 부분들이 잘 맞아떨어졌다. 은퇴는 부상 탓이다. 은퇴 직전 시즌에는 뛰는 내내 고통을 느꼈다. 그런 무릎을 갖고 계속 뛰는 것은 무리였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며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은퇴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숱한 클럽을 거치면서 가장 우선시한 기준이 있었는지.
“감독이 얼마나 날 원하느냐가 최우선 순위였다. 솔직히 일본 J리그 교토상가로 갈 때는 이런저런 것들을 배제한 채 막연히 한국과 다른 축구를 경험하자는 마음이 컸다. 그 후에는 감독이 날 얼마나 크게 쓸 수 있는지가 중요했다. (많은 이들이 의문을 보이지만) QPR로 향할 때도 불안감은 전혀 없었다. 혹여 완전히 실패하더라도 내 과거가 사라지는 게 아니란 생각을 했다.”
-당신은 정말 어떤 선수였나? 그냥 성실함이 무기는 아닐 텐데.
“딱히 언급할 만한 장기가 없는 선수? 그렇다고 특별한 단점도 없었기에 생존할 수 있었다. 난 유럽과 전혀 다른 문화에서 온 이방인이었는데, 그 문화가 외국 감독들이 굉장히 좋아할 수 있는 성향을 심어줬다. 감독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 감독이 신선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2008년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뛰지 못했는데, 그 순간은 정말 화가 났다. 그런데 난 스스로 문제를 찾아냈다. 결과적으로 날 뛰지 않게 한 것은 감독의 옳은 판단이었다. 그를 통해 날 더욱 단련하고 발전시킬 수 있었으니. 이듬해 우승하진 못했지만,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또 한 번의 결승전에 나설 수 있지 않았나. 우승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일원이 아니었다면 내 인생에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역시 없었다.”
런던 | 남장현 기자 yoshike3@donga.com